용감한 늑대의 주절주절
공주병 말기 딸을 위한 한글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본문
다섯 살 딸아이는 공주에 진심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공주병 말기다.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는 “공주 옷입히기 게임”이다. 특히 코코미 공주 옷입히기 게임의 위력은 대단하다. 평소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머리 감기도, “머리 감으면 공주 옷입히기 할 수 있어”라는 말 한마디면 자처할 정도다.
머리를 감는다.
그것도 스스로 하겠다고 한다.
공주의 힘은 위대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순순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반항이 심했다. 씻기 싫다, 지금 하기 싫다, 먼저 놀고 싶다, 왜 꼭 해야 하냐. 매일 비슷한 실랑이가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할 건 다 하고 나서야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
말은 쉽지만, 실제 육아 현장에서는 꽤 지난한 일이다. 아이는 당장 하고 싶고, 부모는 해야 할 일을 먼저 끝내야 한다. 그 사이에서 협상과 설득과 기다림이 오간다. 가끔은 목소리가 커지고, 가끔은 서로 지친다.
그래도 인내에 인내에 인내를 더했다.
머리 감고, 양치하고, 해야 할 일을 끝낸 다음에 공주 옷입히기를 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매번 천사처럼 협조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섯 살은 다섯 살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흐름을 안다.
해야 할 일을 끝내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그렇게 공주 옷입히기 게임은 우리 집에서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일종의 동기부여 장치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기에 영어 공부가 추가됐다.
영어 공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좀 불만이었다. 한국인인데. 아직 첫째 딸아이는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데. 그런데 벌써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물론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아이가 영어에 익숙해지는 게 나쁠 리도 없다. 다만 순서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아직 한글도 낯설어하는 아이에게 영어부터 들이밀어도 괜찮은 걸까. 이게 아이에게 공부라는 피로감만 먼저 주는 건 아닐까.
그런데 아이는 또 해냈다.
코코미 공주 옷입히기를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영어 공부를 했다. 정확히 공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긴 했다. 따라 말한다기보다 웅얼거리는 쪽에 가까웠고, 문장을 이해한다기보다 소리를 흉내 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A와 B 같은 글자는 제법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라?
이게 되네?
아이가 영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물어보면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그 재미의 절반 이상이 그저 공주 옷입히기를 하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강력한 욕망 앞에, 하기 싫은 일도 조금씩 통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글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한글 공부를 정면으로 내밀면 아이는 싫어할 수 있다. “자, 이제 ㄱ을 배워보자”라고 하면 표정부터 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주 옷입히기 안에 한글을 살짝 넣으면 어떨까.
드레스를 입히기 전에 글자를 하나 고른다든지.
왕관을 얻으려면 소리를 한번 들어본다든지.
“가”, “나”, “다”를 맞추면 새로운 리본이 열린다든지.
공부가 아니라 놀이처럼.
문제집이 아니라 드레스룸처럼.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중요한 건 “학습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는 “오늘은 ㄱ을 익혀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냥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싶다. 공주에게 왕관을 씌우고 싶다. 반짝이는 구두를 골라주고 싶다.
그 욕망을 막을 게 아니라, 그 욕망이 가는 길목에 한글을 살짝 놓아두면 어떨까.
먼저 시중에 비슷한 게임이 있는지 찾아봤다. 공주 옷입히기 게임은 많았다. 한글 학습 앱도 많았다. 그런데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처럼, 공주 옷입히기와 한글 놀이가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형태는 잘 보이지 않았다.
AI에게도 물어봤다.
이런 게 없다는 건 블루오션일 수도 있고, 반대로 기존 회사들이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듣고 보니 둘 다 그럴듯했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팔 생각이 없었다. 시장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앱스토어에서 대박을 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집에 필요해 보였다.
공주 옷입히기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 한글을 조금 더 재미있게 만나게 해주고 싶은 아빠가 있다. 그 사이에 작은 게임 하나를 만들어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전문 게임 개발자도 아니고, 유아교육 전문가도 아니다. 완벽한 커리큘럼을 설계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요즘은 AI와 함께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머릿속에 있는 장면을 말로 설명하고, 부족한 부분을 다시 고치고, 화면을 보면서 또 바꾸는 식으로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바이브코딩이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 아닐까.
처음부터 완벽한 설계도를 들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은 장면을 붙잡고 AI와 대화하면서 한 걸음씩 구체화하는 것. 코드를 전부 이해하고 통제한다기보다, 원하는 경험을 계속 설명하고 조정하면서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했다.
거창한 프로젝트는 아니다.
엄청난 교육 혁신도 아니다.
수익 모델도 없고, 시장 분석도 없다.
그냥 공주병 말기 다섯 살 딸을 위한 한글 옷입히기 게임.
딸은 공주를 입히고 싶고,
나는 그 길목에 한글을 살짝 놓아보고 싶다.
블루오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시장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분명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러면 한번 만들어보자.
다음 글에서는 이 막연한 생각을 실제 화면으로 옮기기 시작한 과정을 적어보려고 한다. 공주 하나 세워놓고 옷만 갈아입히면 될 줄 알았는데, 만들다 보니 생각보다 고민할 게 많았다. 버튼 크기, 화면 비율, 드레스 정렬, 아이가 헷갈리지 않는 흐름,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공주는 쉬워 보였지만, 공주를 위한 게임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