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늑대의 주절주절
공주병 말기 딸을 위한 한글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2 본문
아이디어가 떠오른 뒤, 먼저 한글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순서는 단순했다.
자음은 ㄱ부터 ㅎ까지.
모음은 ㅏ부터 ㅣ까지.
그다음은 받침 없는 단어.
마지막은 받침 있는 단어.
처음부터 거창한 한글 교육 앱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공주 옷입히기를 좋아하는 딸이 한글을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만나게 하는 것.
바이브코딩으로 만들다 보니 시행착오는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MVP가 나왔다.



구조는 이랬다.
ㄱ을 클리어하면 옷장 아이템 하나가 해금된다.
그리고 다음 글자인 ㄴ으로 넘어간다.
글자를 하나씩 깨면서 공주의 옷장이 조금씩 채워지는 방식이다.
음성도 넣었다. 대사 하나하나를 녹음해서 웹 스토리지에 올리고, 아이가 버튼을 누르면 공주 목소리로 글자와 안내가 나오도록 했다.
패드로 하니 손가락이나 펜슬로 글자를 따라 그릴 수도 있었다. 아이는 꽤 흥미를 보였다. 글자를 듣고, 따라 그리고, 클리어하면 옷이 열렸다. 해금된 옷을 꺼내 공주에게 입히는 것도 좋아했다.
이미지도 AI로 만들었다. 아이가 원하는 디즈니풍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만들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는 충분히 좋아했다. 어른 눈에는 조금 어색한 그림도, 아이에게는 그냥 “새 옷”이었다.
여기까지는 꽤 성공처럼 보였다.
그런데 ㄹ쯤 가니까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아했다. 공주 목소리도 있고, 옷도 열리고, 글자도 따라 그릴 수 있는데 왜 금방 질릴까?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다.
이건 여전히 학습 앱이었다.
겉으로는 공주 옷입히기처럼 보였지만, 중심에는 한글 공부가 있었다. 글자를 깨야 옷을 얻고, 다음 글자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결국 “공주 놀이를 하기 위해 공부를 통과해야 하는 구조”였다.
반면 코코비 공주 옷입히기는 바로 놀 수 있다. 바로 고르고, 바로 입히고, 바로 바꾼다. 아이가 좋아하는 건 그 즉시성이었다.
공주 목소리도 효과가 있었다.
옷장 해금도 효과가 있었다.
따라 그리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붙잡기에는 부족했다.
이번 MVP를 만들고 깨달았다. 문제는 콘텐츠 양이 아니라 구조였다.
학습을 먼저 시키고 보상으로 옷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옷입히기 놀이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한글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숨어 있어야 했다.
아이는 공부하러 온 게 아니다.
공주를 꾸미러 온 것이다.
이걸 잊으면 코코비를 이길 수 없다.
다음 단계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한글 학습 앱에 공주 옷입히기를 붙이는 게 아니라, 진짜 공주 옷입히기 게임 안에 한글을 녹여야 한다.
MVP는 실패가 아니었다.
다만 다섯 살 아이가 아주 정확하게 알려줬다.
재미없으면 바로 떠난다.

